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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STATEMENT 

두 사람이 진정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관계를 맺을 때, 신(God)은 그들 사이의 파도 치는 전기와 같다. 마틴 부버 [ 나와 너 ] 

“When two people relate to each other authentically and humanly, God is the electricity that surges between them.” ― Martin Buber [Ich und Du] 
먼 북소리, 가야금 소리- 내 유년의 추억. 내 작업이 부동의 페인팅에서 움직임이 가미된 비디오 아트로, 퍼포먼스로 발전되어진 중심에, 국악이 있다. 유년 시절 배운 가야금, 판소리, 사물놀이가 주었던 소리와 몸짓은 미술을 전공한 후에도 내 몸속에 뿌리처럼 흐르고 있었다. 소리, 이미지, 움직임과 부동의 캔버스 사이에서 방황하던 내게 뉴욕에서 배운 기술과 자유분방함은 타 분야간의 융합을 이루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전통적 음악적 요소와 연극적 요소를 기술로 포장하여, 나는 총체적 멀티미디어 아티스트가 되었다. 비결정성과 혼합 예술의 형식 뒤로 내 작업 내용의 본질에 자연과 사람이 있다. 자연을 통해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술로 포장해서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점. 내 작업은 예술과 기술의 결합을 바탕으로, 자연주의적 감수성을 통한 동양적 사유를 하고 있다. 특히, 음악의 시각화, 자연주의적 동양적 사유 , 기술로서 미디어 장치로 예술을 포장하는 내 작업의 뿌리를 나는 “백남준” 로부터 찾고 있다.

가야금이 내게 준 것은 철학- 인과 양 6 줄씩 12 줄은 12달을 의미한다. 인과 양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극이 결국 하나로 만난다는 Tao는 죽음 문턱에서 다시 만난 삶과 같다. 밀물과 썰물은 서로를 품고, 해와 달은 서로를 애증 하며 뒤따른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리고 죽음의 충동을 잠재우는 것은 반복이다. 파도와 바람은 반복 속 변주된 리듬으로 차이를 만든다. ( Tao of Ego 2010-2013) 드로잉과 작곡, 가야금과 프로그래밍을 거쳐 종합적 퍼포먼스로 귀결된 이유에는, 관객과의 상호 소통이 가장 긴밀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강점 때문이다. 상호&몰입, 개방성,비결정성,관객 참여, 미디어 아트,그리고 작가의 현전(exist in the present)을 통해 작업은 관객과 작품 간의 거리 좁히기에 대한 실험으로 고찰된다.

2012년 전도성 물감의 발견은, 내게 새로운 시도를 주었다. 그림을 그리되, 전기가 통하는 물감 위에 또한 전기가 통하는 목탄으로 그림을 그리면, 소리와 이미지가 동시에 발생하도록 프로그래밍했다. 이미지와 소리와 몸짓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터랙션은 유년에 배운 사물놀이와 같은 맥락을 가지고 무아지경으로 이끈다. 4가지 악기의 조화는 4계절의 반복 과도 같아 나는 새로운 기술을 통해 자연의 변화를 그림 그리고, 작곡하며 동시에 춤추는 퍼포먼스 작업을 발전시켰다. 퍼포먼스의 결과물은 그래픽 노테이션으로, “음악적 또는 행위적” 악보로서 드로잉화 되었다. 악보처럼 나열되는 이미지들은, 타자가 해석할 수 있는 디코딩화의 가능성에 대한 실험이 된다.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이 강한 기질은 관객 참여를 중요시 하는 인터랙티브 아트로, 관객과 직접 만날 수 있는 퍼포먼스로 귀결되었다. 혼자만의 작업에서 둘로, 일(1)에서 이(2)로- 당신과 함께하는 공동작업으로 발전시키게 된 계기는, 2014년 이미지 극의 대가인 로버트 윌슨이 설립한 워터밀 센터에서 만난 한 댄서와의 만남이다. 그의 숨소리는 바다와 같았고, 나는 “동양사상과 현대철학” 의 서문에서 읽었던 파도의 한 싸이클이 우주의 한 호흡과 같다는 철학을 한순간 몸으로 깨달았다. 타인에 의한 영감은 혼자만의 침잠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즉각적이며 힘이 넘쳤다. 그 후로, 댄서와 배우와 보컬리스트와 끊임없이 협업했다. 작업에 드러나는 그들과 주고받는 대화는 기표가 아닌 기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야기는 십우도의 열가지 단계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나의 이미지가 그들의 몸짓과, 소리와 대사와 대화했다. 그러기에 우리의 대화는 언캐니했으며 때로는 우연한 효과에 의해 예상치 못한 갈등이 야기되었다. 가야금과 드로잉과 프로그래밍을 통한 인터랙션은 전통적 극과 다른 확장된 구조를 마련해 주었다.

2014년, 한 아이를 잃은 어머니를 그리고자 했던 시도는 내 작업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았던 순간, 강한 감정이입- Einfuhlung ( Empathy ) 갖게 되었다. 작가로서의 나는 관객이라는 너로 인하여 나가 된다. ‘나’는 관객과의 만남을 위해, 작업 속에 현존한다. ‘나’는 미디엄이자 영매이며, 철저하게 ‘무’ 이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라는 마틴부버의 말처럼, 나는 너와의 만남을 통해 나의 의미를 찾는다. 나와 너의 만남은 밀물과 썰물처럼 반복되는 파도의 순환처럼, 삶과 죽음처럼 반대적인 의미이지만 서로를 품고 있는 관계로서 참된 삶을 이룬다. 나와 너가 만나는 매개체로 “몸”( BODY ) 을 사용한다. 인간의 몸은 전도성이다. 전도성, 전기가 통하는 매체가 방법적 주를 이룬다. 특히, 전기가 통하는 전도성 물감은, 소리와 이미지의 결합을 위해 사용되는 주요한 매체가 된다. 전도성 물감, 테입, 실, 천이 2차 평면 위에, 3차 공간 속에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이미지와 소리와 움직임을 연결한다. 나의 신체의 일부가 타자의 신체와 접촉할 때 너와 나 사이에 흐르는 전기는, 소리와 빛과 움직이는 이미지를 발생시킨다. 몸짓이 목소리를 발생시키고, 침묵이 소리 없는 절규가 되며, 언어가 존재를 대변한다. 손을 잡는 행위가 당신의 존재를 알리는 목소리로 치환될 때, 그 찰나에 생기는 균열은 알베르 까뮈가 말한 “무대장치가 문득 붕괴되는 순간”이다. 한 어머니의 손을 잡았던 순간, 무대가 붕괴되었다. 존재와 존재가 진정으로 관계를 맺을 때 그 사이에 파도 치는 신 (God) 이 있다. 너와 나의 반복적 접촉에 의한 미묘하고 복합적인 심리를 통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실험이 지속된다. 나와 너는 주체와 객체, 객체와 객체, 그리고 온전한 주체와 주체의 만남이 되어 해자와 밀물과 썰물처럼 파도를 이룬다. 실루엣을 통한 객관적 외형은, 빛을 통해 주체가 된다.

나, 가 너로 인해 나로 되는 방법으로 1차 재현으로서 너를 그린다.( Drawing you by your 12words : 2014-2015) 2차 재현을 넘어 현존을 위해 잃어버린 나를 찾는다 ( 십우도 : Performing with YOU 2015-2016) 3차 현존 으로서, 십우도의 10번째 그림, 세상 밖으로 나가 손을 드리운다. 나는 너의 손을 잡는다, 발을 씻긴다, 때린다, 안는다. 모든 행위와 접촉은, 전도성을 통한 전류의 흐름을 만들고, 빛을 생산 시켜 사운드와 영상을 재생산한다. (Halbe Nacht 2016) ( Ich und Du : Empathy project 2016-2017 ) 난민, 테러, 상처와 고통이 가득한 현 시대에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작가로서 할 수 있는 관계의 복원은 무엇일까. 타인의 고통에 대응하는 나는 누구 인가로 시작해 작업은 “나와 너”의 관계적 실험을 통해, 나와 너의 만남으로 귀결된다. 만남의 방식을 “Empathy : 타인의 고통을 함께하다 ( 사전적 정의 - 나의 신발을 벗고, 너의 신발을 신다 )” 로 풀어낸다.

파도의 한 호흡이 반드시 다시 돌아오듯이, 오늘의 슬픔은 기쁨으로 돌아올 것이다. 언제나, 자연속에서도 가슴속에서도 하나의 극은 다른 극을 향해 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내 예술이 당신을 위한 것이길 원한다.당신에게 따뜻한 속삭임이, 위로가, 기쁨이 되어주길 원한다. 당신들의 이야기가 내 감성을 통해 아름답게 드러나, 자연이 주는 경외감으로 당신들에게 다가가길 원한다. 당신을 위해. 나의 당신을 위해.